계약 체결을 확실히 믿게 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도록 한 뒤,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을 거절하여 손해를 입히면 불법행위책임이 생길 수 있다.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교섭 과정의 책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2001다53059 판결요지 [3], 민법 제750조).
쉽게 말하면 — 계약을 논의하다가 합의하지 못했다고 언제나 배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약이 확실히 될 것처럼 믿게 하여 준비하게 해 놓고,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거절해 손해를 입혔다면 책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2001다53059 판결요지 [3]).
계약이 안 됐는데도 왜 책임이 생기나?
계약 체결을 확실히 믿게 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도록 한 뒤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을 거절하면, 정당한 신뢰를 침해한 데 대한 책임이 생길 수 있다. 이는 계약을 이행할 의무와 구별되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책임이다(2021다216773 판결요지 [1], 민법 제2조).
유효한 계약에 따른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경우는 채무불이행의 문제다(민법 제390조). 목적이 불능한 계약을 체결할 때 그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자에게는 별도의 신뢰손해 배상책임이 있다. 다만 상대방도 불능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적용되지 않으며, 배상액은 계약이 유효했다면 생길 이익액을 넘지 못한다(같은 법 제535조).
신뢰 침해에 따른 불법행위는 계약 체결 전의 부당한 거절뿐 아니라, 계약서를 작성했어도 효력 발생에 필요한 절차를 게을리한 경우에도 문제 된다(2001다53059 판결요지 [3]·[4], 2023다258658 이유 3.가).
어떤 사정이 있어야 부당한 파기가 되나?
확실한 계약 체결에 대한 정당한 신뢰, 그 신뢰에 따른 행동, 상당한 이유 없는 거절과 손해가 연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계약을 원했다거나 오랫동안 협상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상대방이 무엇을 약속하거나 요구했는지와 협상이 중단된 이유를 함께 본다(2001다53059 판결요지 [3], 99다40418 이유 2.나).
대법원은 대규모 건설공사의 견적서·이행각서·하도급보증서가 제출된 사안에서도 정당한 신뢰가 형성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공사조건의 합의와 발주처 승인 등이 남아 있었고, 원고들이 다른 업체의 견적을 비교할 수 있었던 사정 등을 종합하여 청구를 배척한 원심의 결론을 유지하였다. 견적서 한 장을 받았다는 사실과 계약이 확실히 성립하리라는 신뢰는 같지 않다(99다40418 판결요지 [1]·[2], 이유 2.나·주문).
반대로 조형물 시안이 당선되었다고 통보하고 그 작가와 계약할 것을 예고한 뒤, 내부 사정을 들어 협의를 미루다가 다른 작가에게 제작을 맡긴 사건에서는 부당한 파기가 인정되었다. 제작대금·시기·설치장소 등에 관한 합의가 없어 본계약은 성립하지 않았지만, 당선 통보로 생긴 정당한 신뢰는 보호되었다(2001다53059 이유 1·2).
계약을 했다면 벌었을 돈까지 받을 수 있나?
배상 대상은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될 것이라고 믿어 입은 신뢰손해이며, 계약 이행으로 얻었을 이익을 그대로 청구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가 없었다면 지출하지 않았을 계약준비비용 등이 해당하지만, 확고한 신뢰가 생기기 전에 경쟁입찰 참가를 위해 쓴 제안서·견적서 비용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2001다53059 판결요지 [4]).
조형물 사건에서 대법원은 계약 이행으로 얻었을 창작비 상당의 손해와 당선 통보 전의 시안 제작비를 배상 범위에서 제외하였다. 위자료를 인정하면서 재산상 손해 청구를 배척한 원심의 결론을 유지하고 상고를 기각했다. 따라서 지출내역만 모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각 지출이 언제 어떤 신뢰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구별해야 한다(2001다53059 이유 2·주문).
상대방 요구로 먼저 이행한 비용은 어떻게 되나?
계약 전의 이행 준비·착수 비용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위험 판단에 따른 부담이다. 다만 상대방의 적극적인 요구로 이행을 시작했고 그 비용 지급에 관하여 이미 교섭하고 있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이행을 위해 지출했거나 지출할 것이 확실한 비용도 계약 체결을 신뢰하여 생긴 손해로서 배상 대상이 될 수 있다(2021다216773 판결요지 [2]).
증권회사 직원의 요청에 따라 다른 증권회사가 기업어음을 매수·보관한 사건에서 이러한 비용의 배상이 문제 되었다. 당사자 사이의 매매계약 등이 성립했다는 주장은 배척하면서도, 정당한 신뢰를 부여한 뒤 상당한 이유 없이 매수를 거절한 데 따른 매수비용 등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유지하였다. 원고도 부도위험과 거래 경위에 따른 손해 일부를 부담하게 한 책임 제한 역시 유지되었다(2021다216773 판결요지 [3], 이유 2~4·주문).
정신적 손해도 배상받을 수 있나?
교섭 파기나 필요한 절차의 위반이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여 정신적 고통을 초래했다면 별도로 위자료를 구할 수 있다. 계약을 기대했다가 실망했다는 사정만이 아니라, 침해행위와 피해법익의 유형을 보아야 한다(2023다258658 판시사항 [1]·이유 3.가, 민법 제751조 제1항).
주식매수선택권 부여에 필요한 정관·주주총회 절차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대표이사가 의사록을 위조한 사건에서, 대법원은 근로 여부를 선택할 자기결정권 등 인격적 이익의 침해 가능성을 인정했다. 재산상 손해 청구를 배척한 판단은 유지하되, 예비적 청구 중 위자료 청구를 배척한 부분만 파기환송하였다. 필요한 절차를 게을리한 행위도 단순한 계약 거절과 함께 불법행위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2023다258658 판시사항 [2]·이유 3·주문).
손해액과 청구기간은 무엇을 확인하나?
손해액은 부당파기와의 인과관계 및 피해자의 과실 등을 따지고, 청구기간은 손해와 가해자를 안 시점 및 불법행위 시점을 구별하여 확인한다(민법 제763조, 같은 법 제396조, 같은 법 제766조). 불법행위에도 손해배상 범위 규정이 준용되어 통상의 손해를 한도로 하며, 특별한 사정으로 생긴 손해는 가해자가 그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 한하여 배상책임이 있다. 지출한 비용 전부가 언제나 배상되는 것은 아니다(같은 법 제763조, 같은 법 제393조).
불법행위 손해배상청구권에는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손해와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라는 소멸시효 규정이 적용된다. 교섭 중단 통지일만으로 기산점을 단정하지 말고 손해 발생과 인식 시점을 확인해야 한다(민법 제766조 제1항·제2항). 단기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되어야 진행하며, 권리행사의 객관적·합리적 기대가능성을 부정하는 사유도 살펴야 한다. 개인적 사정이나 권리의 존재·행사 가능성을 몰랐다는 사정만으로 시효 진행이 멈추지는 않는다(같은 법 제166조 제1항, 2023다285162 다수의견 이유 2.가2~4).
계약이 성립했는지의 다툼과 실제로 누구와 교섭했는지의 문제는 각각 청약과 승낙, 계약당사자의 확정과 연결된다.
실무 체크포인트
- 계약 체결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부여한 통보·요청과 그에 따른 행동을 시점별로 정리한다(2001다53059 판결요지 [3]).
- 비용은 신뢰 형성 전후로 나누고, 상대방이 이행 착수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는지도 확인한다(2001다53059 판결요지 [4], 2021다216773 판결요지 [2]).
- 위자료는 인격적 법익의 침해와 정신적 고통의 근거를 따로 확인한다(2023다258658 판시사항 [1]).
- 계약상 이행청구와 불법행위 손해배상을 혼동하지 않고, 불법행위의 시효도 따로 확인한다(민법 제390조, 같은 법 제76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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