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은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할 때의 태도를 정한 민법 총칙의 일반원칙이다. 민법 제2조 제1항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정한다. 조문은 이 한 문장뿐이고, 위반의 요건도 효과도 따로 정하지 않았다. 같은 조 제2항의 권리남용 금지는 권리남용에서 본다.
쉽게 말하면 — 계약이나 법률관계를 다룰 때 상대가 정당하게 믿을 만한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다만 조문은 한 줄뿐이라, 어떤 경우가 위반인지는 판례로 쌓여 왔습니다. 그래서 신의칙을 들 때는 상대가 괘씸하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이 신뢰를 만들었고 그 신뢰가 왜 정당했는지를 대야 합니다.
신의칙 위반이라고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대법원은 요건을 나누어 판시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률관계의 당사자가 지켜야 할 추상적 규범이다.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하여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2007다61113 이유).
그 위배를 이유로 권리 행사를 부정하려면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 먼저 상대방에게 신의를 공여하였다거나, 객관적으로 보아 상대방이 신의를 가짐이 정당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2007다61113 이유). 나아가 이러한 상대방의 신의에 반하여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정의관념에 비추어 용인될 수 없는 정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같은 판결 이유).
이 판시는 판결요지가 아니라 2007다61113 이유에 있다. 그 판결의 판시사항·판결요지는 민법 제482조의 보증인·물상보증인 사이 대위비율이고, 위 요건 문장은 이유가 종전 판례를 인용해 적은 일반법리다. 그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 요건을 대어 원심을 뒤집었다. 20년 가까이 이의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신의를 공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같은 판결 이유).
신의칙만으로 청구가 막힌 예가 있나?
전원합의체가 신의칙만으로 소유권에 기한 청구를 막은 예가 있다. 법정지상권을 가진 건물소유자로부터 건물을 양수하면서 법정지상권까지 양도받기로 한 자가 문제되었다. 이런 자는 채권자대위의 법리에 따라 차례로 지상권의 설정등기 및 이전등기절차 이행을 구할 수 있다(84다카1131 판결요지 다수의견).
이러한 지위에 있는 자에 대하여 대지소유자가 소유권에 기하여 건물철거 및 토지인도 등을 구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같은 판결 다수의견). 반대의견은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의 지나친 확장적용이라고 보았다(같은 판결 반대의견). 뒤의 판결도 같다(85다카2203).
가족관계에서도 같은 방식이 쓰였다. 피상속인의 처가 가출하여 재혼을 하고 피상속인의 처로 기재된 호적까지 말소한 사안이다. 대법원은 그 처가 피상속인 사망 후에 상속인임을 주장하는 청구는 신의칙상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93다26007 판시사항). 판시사항과 판결요지 모두 「사례」로 적혀 있어, 배우자 상속권의 실효를 일반화한 판시는 아니다.
청구권의 범위를 깎는 데도 쓰이나?
쓰인다. 사용자가 피용자의 업무수행과 관련한 불법행위로 손해를 입어 구상하는 경우다. 이때 사업의 성격과 규모, 피용자의 업무내용, 근로조건이나 근무태도 등 제반 사정을 참작한다. 그리하여 손해의 공평한 분담이라는 견지에서 신의칙상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된다(92다25595 판결요지. 참조조문은 민법 제756조 제3항이다). 뒤의 판결도 같다(2009다59350 판결요지 [1]).
다만 이 제한을 누구나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의 감독이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피용자가 있다. 그가 바로 그 사용자의 부주의를 이유로 자신의 책임의 감액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상 허용될 수 없다(2009다59350 판결요지 [2]).
같은 신의칙이라도 쓰임이 둘로 나뉩니다. 청구를 통째로 막기도 하고, 청구는 인정하되 금액을 상당한 선까지 깎기도 합니다.
신의칙으로 법률이 정한 효과를 뒤집을 수 있나?
판례는 이를 경계한다. 강행법규를 위반한 자가 스스로 그 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한 사안이 있다. 대법원은 그 주장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는 권리의 행사라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같은 법의 입법취지를 완전히 몰각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했다(97다33218 판결요지 [2]). 그래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러한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같은 판결 판결요지 [2]).
2020년 전원합의체 판결의 다수의견 보충의견은 이 문제를 다뤘다. 상속채권자가 단순승인한 상속인의 고유재산에 강제집행할 수 있는 것은 당연승계주의 법제에서 단순승인으로 생기는 당연한 법적 효과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 권리 행사를 일률적으로 신의칙에 반한다고 평가하여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고 했다(2019다232918 다수의견 보충의견). 다만 상속채권자가 강제집행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하여 상속인이 특별한정승인을 하지 않은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개별 사건에서 권리남용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같은 판결 다수의견 보충의견). 그 뒤 신설된 민법 제1019조 제4항은 미성년 상속인이 성년이 된 후 초과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게 하는데, 부칙은 시행 이후 개시된 상속에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고 시행 전 개시분은 시행 당시 미성년이거나 시행 후 초과사실을 안 경우로 한정한다(민법 부칙(2022. 12. 13.) 제2조 제1항).
그 뒤 2022년 12월 13일 신설된 민법 제1019조 제4항은 미성년 상속인이 성년이 되기 전에 단순승인한 경우 성년이 된 후 상속채무 초과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위 판결의 미성년 상속인 특별한정승인 결론은 현행법에서는 이 조문이 정한 범위만큼 달라졌다.
금반언·실효·사정변경은 어떻게 되나?
강학상 신의칙의 발현 형태로 드는 것들이다. 대법원은 항소권과 같은 소송법상의 권리에도 실효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2004다63408 판시사항 [2]). 그 판단은 권리 불행사의 기간과 당사자의 사정,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 등을 모두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한다(같은 판결 판시사항 [2]). 참조조문은 민법 제2조다(같은 판결). 소송법상 권리에서의 적용은 소송상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본다.
금반언을 적용한 예도 있다. 대법원은 무권대리인이 본인을 상속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된 뒤 자신의 무권대리행위가 무효라고 주장하여 등기말소 등을 구하는 것은 금반언의 원칙이나 신의칙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94다20617 판결요지).
사정변경의 원칙은 계약 성립의 기초가 된 사정이 현저히 변경되고 당사자가 이를 예견할 수 없었으며,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당사자의 이해에 중대한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계약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계약준수 원칙의 예외로 해제·해지를 허용한다. 계약의 기초로 삼지 않은 사정이나 어느 일방이 변경에 따른 불이익 또는 위험을 떠안기로 한 사정은 포함되지 않는다(2016다249557 판결요지 [1]).
실무 체크포인트
- 어떤 행위가 신의를 공여했는지와 상대방의 신뢰가 객관적으로 정당했는지를 나누어 적는다(2007다61113).
- 구체적 조문으로 해결되는 사안은 그 조문을 먼저 든다. 강행법규나 법률이 정한 당연한 효과를 신의칙으로 뒤집으려는 주장이 배척된 예가 있다(97다33218, 2019다232918).
- 소멸시효 항변이나 상계권 행사에서의 남용은 권리남용에서 본다.
- 소송절차에서의 적용과 소권 남용은 민사소송법 제1조 제2항이 근거다(소송상 신의성실의 원칙).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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