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남용 금지는 권리 행사의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그 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원칙이다. 민법 제2조 제2항은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정한다. 조문은 이 한 문장뿐이고 남용의 요건도 효과도 따로 정하지 않았다. 같은 조 제1항의 신의성실은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본다.
쉽게 말하면 — 내 권리를 쓰는 일이라도 도가 지나치면 법원이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조문은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한 줄뿐이라, 어떤 경우가 남용인지는 판례로 쌓여 왔습니다. 그래서 남용을 주장할 때는 상대가 밉다는 말이 아니라, 그 권리 행사가 제도의 목적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구체적으로 대야 합니다.
남용인지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권리 행사의 형식이 아니라 그 정도를 본다. 대법원은 모든 권리행사에 필연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형식적으로는 권리행사라 하여도 그것이 권리의 사회성과 적법성의 관념에 비추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 권리의 행사는 부인되어야 한다(91마500 판결요지 다).
사안은 당시 구 민사소송법상 경매의 전 경락인이 대금을 다시 낼 기회를 얻으려 한 경우다. 첫 재경매기일에서 의도적으로 소란행위를 하거나 이를 조종해 경매불능을 초래했다면, 그렇게 지정된 두 번째 재경매기일 3일 이전에 매입대금 등을 납부하더라도 권리의 정당한 행사라 할 수 없다(91마500 판결요지 라). 다만 대법원은 그 소란행위가 전 경락인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미흡하다며 더 심리하라고 했다(같은 결정 이유).
가해 목적 같은 주관적 요건이 필요한가?
판례는 사안 유형을 나누어 판시했다. 상계권 행사에 관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보았다. 상계권 행사가 상계 제도의 목적이나 기능을 일탈하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에는, 그 행사는 신의칙에 반하거나 상계에 관한 권리를 남용하는 것으로서 허용되지 않는다(2002다59481 판결요지 [1]). 그 판단은 채권이나 채무를 취득하게 된 목적과 경위, 상계권을 행사함에 이른 구체적·개별적 사정에 비추어 한다(같은 판례). 이어서 “상계권 행사를 제한하는 위와 같은 근거에 비추어 볼 때 일반적인 권리 남용의 경우에 요구되는 주관적 요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같은 판례).
이 판시는 상계권이라는 사안 유형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권리 남용의 경우에 요구되는 주관적 요건”이 무엇인지는 이 판결이 밝히지 않았다. 상계권 남용의 구체적 판단은 상계에서 본다. 다만 92므907 이유는 「타인에게 손해를 줄 목적만으로 하여지는 것과 같이」를 권리남용의 예로 들고, 2002다59481 판결요지 [1]도 일반 유형에는 주관적 요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상계권 사안을 그 예외로 다룬다.
남용으로 판단되면 권리가 없어지는가?
제2조 제2항은 남용의 효과를 정하지 않는다. 권리가 소멸하는지에 관해서도 조문은 침묵한다. 판례가 다룬 방식은 그 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91마500도 “그 권리의 행사는 부인되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권리의 존속과 행사 제한을 나누어 판단한 예가 있다. 중혼 성립 후 10여 년 동안 혼인취소청구권을 행사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권리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으나 그 행사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다(92므907 판시사항 나). 헌법재판소도 중혼 취소청구권에 소멸사유나 제척기간을 두지 않은 것을 합헌으로 보면서, 후혼이 뒤늦게 취소되어 가혹한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는 법원이 권리남용의 법리 등으로 해결한다고 했다(2011헌바275 판결요지).
92므907 사례에서는 중혼을 이유로 혼인 취소를 구할 권리 자체가 10여 년의 불행사로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그 행사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권리 행사에서 문제되었는가?
소멸시효 항변에서 가장 자주 다투어졌다.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2002다32332 판결요지 [1]). 특히 채무자가 시효의 이익을 원용하지 않을 것 같은 신뢰를 부여한 경우, 채권자는 그러한 사정이 있은 때부터 권리행사를 기대할 수 있는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2012다202819 판결요지 [2]). 같은 판결 요지 [3]은 그 기간의 판단 요소와 함께, 불법행위 손해배상에서는 아무리 길어도 민법 제766조 제1항의 3년을 넘지 못한다는 상한을 둔다. 어떤 사유가 여기 해당하고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소멸시효에서 본다.
2026년 전원합의체는 같은 문제를 다른 자리에서 다루었다. 다수의견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3년 단기소멸시효에 관하여, 민법 제166조 제1항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에 대한 궁극적 판단 기준을 “권리행사의 객관적, 합리적 기대가능성”으로 제시했다(2023다285162 판결요지 [1] 다수의견). 이를 시효 항변에서의 권리남용 법리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견이다(같은 판결 별개의견).
회사법에서는 결의의 무효사유로 다루어졌다. 주식병합을 통한 자본금감소가 현저하게 불공정하게 이루어져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이나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경우에도 자본금감소 무효의 원인이 될 수 있다(2018다283315 판결요지 [1]). 다만 그 사건에서는 이에 위배된다고 본 원심 판단에 법리오해가 있다고 보았다(같은 판례 판결요지 [3]).
남용 주장이 배척된 예는 무엇인가?
권리 행사에 앞선 약정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는 남용이 되지 않는다. 상속인이 피상속인 생존 시에 상속을 포기하기로 약정하였더라도, 상속개시 후 민법이 정하는 절차와 방식에 따라 상속포기를 하지 아니한 이상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행사다. 대법원은 이를 권리남용에 해당하거나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의 행사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98다9021 판결요지 [2]).
소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남용으로 볼 때에도 신중해야 한다. 다만 이 판단의 근거 조문은 민법 제2조 제2항이 아니라 민사소송법 제1조 제2항이다. 대법원은 실체법상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소송의 제기를 신의칙에 반하는 소권의 남용이라고 판단할 때에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했다(2022므15371 판결요지 [2]). 그러면서 진실한 신분관계를 귀속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녀의 복리에 현저히 반하게 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친생자관계존재확인의 소도 예외적으로 소권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같은 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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